3년 전 이혼 한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 온 안아무개(19)군은 평생 ‘단순 폭행’이라는 전과 기록을 주홍글씨처럼 새기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안군은 이민 초기 언어의 어려움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중상위권까지 성적을 올렸다. “아직 구체적인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안군, 하지만 영주권·시민권을 취득할 때도, 공공기관에 취업을 하려고 할 때도 그의 전과 기록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도 안군을 심각하게 압박하고 있다. 어머니가 재혼 한 뒤 새아버지와 다툼 끝에 집을 나와 지하 쪽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안군은 오후 3시 학교 수업을 마치면 밤 11시까지 식품점에서 일을 한다. 주 40시간, 방학 땐 60시간을 일하지만 간신히 집세, 식비 등 생활비를 버는 수준이다. 그런 안군에게 법원이 1만3000달러가 넘는 큰돈을 지불하라고 판결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법원은 그에게 ‘단순 폭행’에 대한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악몽’은 지난해 10월 1일 학교 내 식당(카페테리아)에서 벌어진 단순한 주먹다짐에서 비롯됐다.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안군과 새치기를 하려던 타민족 학생 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결국 한두 차례 주먹이 오갔다. 진상조사를 벌인 학교 측은 두 학생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며 5일 동안 정학 처분을 내렸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군과 싸움을 한 상대방 학생의 부모가 안군을 형사고소하면서 이 사건은 학교를 벗어나 법정까지 오게 됐다.
“경찰의 일방적 조사, 불이익 받았지만 항변도 못 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다툼도 있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이런 게 다 교육의 일환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이들을 법원까지 데려와서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해야 하느냐.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의 관용도 가질 수 없나. (아이들의 사소한 다툼을) 법정 밖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에까지 가져와서 처벌을 하겠다는 것은 아이들을 오히려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12일(현지 시각) 저녁 팰리세이즈파크 타운홀, 빈센트 휴즈 변호사는 쉴 새 없이 법정 안을 오가며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최후진술을 이어갔다. 특히 휴즈 변호사는 “만약 검사가 다른 케이스였다면(가해 학생이 한국인이 아니었다면-편집자 주) 이렇게까지 (소송을) 진행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학교의 교장 선에서 해결된 사건에 왜 경찰이 개입하는가? 학교에서는 이미 양쪽 학생이 모두 잘못했다고 해서 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 법정에서 한 아이는 더 많이 다쳤다는 이유로 희생자가 되어 있고, 다른 아이는 가해자가 되어서 앉아 있다. 가해자로 몰린 학생은 부모나 선생님 등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아직 영어가 서툰 이 학생은 혼자 두려움에 떨면서 경찰로부터 일방적인 조사를 받는 등 불이익을 당했지만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휴즈 변호사가 소속된 김&배 법무법인이 안군의 사연을 듣고 무료변론에 나선 것은 이미 사건이 있은 지 3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 사이 안군은 주변의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 휴즈 변호사는 “이건 난센스다. 우리 커뮤니티 안에서 매우 슬픈 일이 벌어졌다”는 요지로 최후진술을 마쳤다. 숨을 죽인 채 방청석에 앉아있던 100여 명의 한인들 사이에서 동시에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는 법정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깜짝 놀란 법원 경비원과 경찰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만 볼 뿐 제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반론에 나선 캐빈 카터 검사는 “학교에서 주먹질 하고 다친 것은 학교만 처벌할 수 있고, 법은 피해자를 지켜줄 수 없는 것이냐”며 “이 법정에 한인들이 많이 나와서 (안군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 학생을 지켜줄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검사가 오히려 ‘역차별’을 주장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카터 검사는 안군에 대해 징역 1년의 실형과 집행유예 1~3년을 요구했던 당초 기소 내용에서 집행유예 1년과 사회봉사·보호감찰 처분 등으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조셉 로톨로 판사는 검찰 측의 요구를 모두 기각시켰다. 대신 안군의 단순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한 뒤, 법정비용과 벌금 등 약 400달러를 부과했다. 약 1만3000 달러에 달하는 치료보상금에 대한 판결은 일주일 뒤로 유보했다. 안군으로서는 실형은 면했지만, ‘단순 폭행’이라는 전과가 남게 됐다. 김&배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인 김봉준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유죄를 선고 받았기 때문에 100%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라며 “전과 기록을 없애는 게 관건”이라고 말해, 항소 의사를 피력했다.
뉴욕총영사 “한인 동포의 관심이 재판부 판결에 영향”
안군의 사건을 처음 한인 사회에 알리면서 도움을 호소한 황재욱(40, 선교봉사단체 ‘필그림하우스’)씨는 “검사가 교내 학생들 간의 사소한 싸움을 법정까지 끌고 와 굳이 형사재판을 받게 한 것은 뭔가 상식에 어긋나는, 편견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또 “어떤 미국인 부모는 ‘내 아이가 싸울 때마다 형사처벌을 받았다면 벌써 사형감’이라고 하더라”며 “그만큼 이번 재판은 말도 안 된다”고 성토했다. 이날 재판을 FOX뉴스, 뉴욕채널1, Record 등 미국 현지 언론 등에서 취재한 것도 ‘과연 이번 사건이 법정 다툼까지 할 만한 사안이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영목 뉴욕총영사도 전날(11일) 제임스 로툰도 팰리세이즈파크 시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 총영사관은 13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안군이 폭력에 대응했을 뿐이고, 굉장히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성실하고 장래가 있는 학생이니,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며 “한국 동포사회가 전부 관심을 보였다는 게 이슈가 됐고, 재판부의 판결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동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안군에 대한 재판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안군을 응원하기 위해 법정으로 몰려든 한인들의 규모였다. 당초 재판이 예정돼 있던 오후 4시경, 법정 안은 200여명 이상의 한인들로 가득 찼고, 들어설 자리가 없자 문을 열어놓은 채 복도까지 늘어섰다. 재판이 오후 6시 30분으로 연기되고, 4시간에 걸쳐 진행되면서 일부 한인들이 돌아가기는 했지만, 재판이 끝난 밤 10시경까지 무려 100여명이 넘는 한인들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 모인 한인들은 대체로 이번 사건을 아시아계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인종차별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장순기(74)씨는 “미국에 온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많은 한인들이 모인 것은 처음 본다”며 “안군의 일은 인종차별이고,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일찌감치 법정에 도착해 가장 앞자리에 앉은 이종만(70)씨는 “오늘 재판에서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며 “우리 애들이 어떻게 기를 펴고 살 수가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2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참석한 제이크 오(21) 버겐커뮤니티칼리지 한인학생회장은 “만약 안군이 유태인이거나 다른 민족이었다면 이런 일을 당했겠느냐”며 “이번 사건은 안군 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전체 한인 학생들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한인 많이 살아도 우린 여전히 마이너리티”
사실 팰리세이드파크는 미국에서 한인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대표적인 한인 타운이다. 미 센서스국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으로 팰리세이즈파크 한인 인구는 1만115명으로 타운 전체 인구의 과반(51.5%)을 넘어섰다. 한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역경제에 미치는 한인들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반면 정치적 위상은 턱없이 낮은 상황이다. 연방의회도 아닌 뉴저지 주 의회조차 단 한 명의 한인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펠리세이즈파크의 경우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제이슨 김 시의원을 비롯해 2명의 한인 시의원과 2명의 교육위원이 있지만 이들은 이번 안군 사건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베이비시터까지 고용해 아이들을 맡기고 왔다는 헬렌 김(43, 주부)씨는 “선거 때마다 한인들에게 손 벌려서 표를 달라던 (한인) 시의원들, 교육위원들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뭘 한 거냐”고 성토했다.
“이 지역에 한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여전히 마이너리티다. 학교에서 이미 판단(징계)을 받았는데 왜 형사재판까지 받아야 하느냐. 안군은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까, 검사가 무고하게 함부로 하려는 것 아니겠나.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이게 정의인가?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가 안군의 부모가 되어 주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다.”
한편 뉴저지주 한인 단체들은 현재 안군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고려, 상대방 학생의 치료비 마련을 위한 후원금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최경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