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취재일기>‘개고기 소송’ 합의가 남긴 교훈

2001년 11월19일 밤 11시. 뉴욕의 공중파 방송의 하나인 워너브러더스(WB11) 방송 뉴스시간에 뉴욕주 업스테이트 한인 농장 업주가 고객을 가장한 동물보호단체 조사원에게 ‘개’처럼 묘사된 동물의 사체를 판매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미국인 사냥꾼이 합법적으로 사냥한 코요테를 농장측에 판 것이었지만 영어에 서툰 농장 주인 부부가 취재기자와 동물보호단체 관계자에게 흡사 경찰의 ‘취조’를 당하다시피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판매한 것은 개가 아니다’라는 농장부부의 항변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사람이 개를 문다’는 방송이 나간지 1년2개월이 지난 2003년 1월3일. 농장 주인 부부를 대신해 한인 변호사는 방송사와 해당 기자를 상대로 진행해온 손해배상·명예훼손 소송을 재판까지 이르지 않고 합의했다. 소송이 시작된지 9개월만의 일이다. 양측은 합의문도 작성했다. 김씨부부와 방송사, 취재기자의 공동성명서(Joint Statement)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양측이 소송과 관련해 법정밖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혀 사실상 소송 합의 성명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배상금에 대해서는 양측이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방송사는 이 성명서를 ‘사과편지(apology letter)’로, 소송 합의를‘한인들의 승리(victory for Koreans)’라고 표현해도 좋다고 합의했다고 이번 소송을 맡은 김씨 부부의 법적 대리인 김봉준 변호사는 명확히 밝혔다.

이날 발표된 공동성명서에는 WB11과 취재를 한 크레이즈맨 기자가‘사실, 김씨농장이 식용 목적의 집에서 기르는 개(domestic dog)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구도 포함됐다. 일부에서는 이날 발표된 성명서가 일전에 방송사측이 개고기 왜곡보도 한인대책위에 보낸 유감 표명 편지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이 성명서가 명백히 사과편지라고 강조했다. 왜곡보도에 대한 시정과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시작된 이번 소송을 통해 방송사의 정정보도를 이끌어 내지 못한 아쉬움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방송사를 상대로 항의에 나섰던 한인단체 및 타민족단체 관계자들은 “미국내 소수계가 크게 위축된 요즘, 이번 소송 합의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며“앞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해도 지레 겁먹고 고개 숙이지 말고 잘못된 것은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송 당사자인 김씨농장 부부에게는 딸만 셋이 있다. 방송이 나간 직후 학교와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들이야 말로 방송사의 보도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 부부는 “애들이 학교에서 기도 못펴고 주눅들 것을 생각해 소송을 결심했다”고 밝혔었다. 소수계인 한인들을 ‘동네북’쯤으로 여기는 일부 주류사회 사람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번‘개고기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안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