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HWA ILBO] B.J. Kim, Partner, interview “Small Dreams for Big Domestic Law Firms”

문화일보1
문화일보2

  Attorney B.J. Kim always dreamed like a pioneer. Spending his childhood in Korea and youth in Hong Kong, he and his close friend decided to move to the United States just before college. After obtaining the license passing bar exams in both New York and New Jersey, he fought and won cases that seemed reckless to others. Although, Kim & Bae, P.C. remains firm as the biggest Korean-American law firm in the East, he still seems hungry. Attorney B.J. Kim said, “I still can’t understand why domestic law firms in Korea only reach out to Vietnam, Russia, China, etc. while disregarding the US market, which is not only 100 times bigger than the domestic market but also the biggest market in the world.” He also mentioned, “They (domestic law firms) think the US market is tough. Yes, it’s not easy, but there are many business opportunities and even freelance attorneys thrive”

기사 원문: 문화일보 <국내 로펌, 한국시장 100배 규모 미국 진출할 생각은 왜 못하나>

美서 KIKO 항소심 승소 ‘도전정신’ 화제… 김봉준 변호사

김봉준(53) 미국 변호사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홍콩에 이민을 간 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친구와 단둘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는 소송을 맡아 기적 같은 결과를 냈다. 지금은 미국 동부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로펌(법률회사) 중 최대 규모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의 꿈은 더 커 보였다. 김 변호사는 최근 한국에 들어와 “한국 로펌이 과감하게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도전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김 변호사를 지난 16일 서울 은평구 있는 사회복지시설 천사원에서 만났다. 김 변호사는 로펌 ‘김앤배’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아내 배문경(47) 변호사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김 변호사 부부는 이곳에 10년 이상 후원을 하고 있다. 김 변호사가 천사원에 후원을 하게 된 것은 ‘친구의 친구’ 때문이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가 고아이고, 그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가 은평 천사원의 원장이 된 것이 후원을 한 계기였다”며 “2005년부터 미국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송년회를 하면서 뜻을 모아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말 파티를 하다가 ‘우리가 우리끼리만 먹고 마시면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든 게 기부의 시작이었다. 처음 김 변호사 부부가 지인들과 함께 모은 돈은 800달러였다. 그 돈이 점점 늘어 지난해는 1만2000달러, 올해는 1만5000달러까지 늘었다. 한인 지인뿐 아니라 미국인 지인들도 기꺼이 기부에 동참했고, 김 변호사 부부에게 기부를 의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김 변호사는 “회사를 더 키워 기부 액수를 더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가족을 따라 10세 때 홍콩에 이민을 떠났지만, 자신이 태어난 대한민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 변호사 부부는 미국에서도 한인들의 권리 찾기를 위해 여러 사건을 맡았다. 김 변호사는 “맡는 사건 중 약 50%는 한인 관련 사건”이라고 말했다. 2014년에는 집주인이 몰래 설치한 감시 카메라에 의해 사생한 침해를 당한 한인 세입자의 손해배상 소송을 맡았으며 국내 은행 미국 지점의 부당해고 사건 등을 대리하기도 했다. 한인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 방송 출연 등으로 적극적으로 사건을 알리고 있다. 그 때문에 1년에 1∼2차례씩 빠지지 않고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미국에서 맡은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2001년 이른바 ‘개고기 사건’을 꼽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미국의 거대 미디어 기업 중 하나인 워너브러더스가 운영하는 지역방송이 한인이 운영하는 한 농장에서 개고기를 비밀리에 거래하고 있다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당시 해당 농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을 대리할 변호사를 수소문했지만 맡겠다는 변호사가 없었다. 거대 방송사와의 소송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방송의 여파로 미국인들은 뉴욕 한복판에서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해당 농장은 사실상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이때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졸업 후 회사에 다니다가 갓 사무실을 개업한 김 변호사가 나섰다. 김 변호사는 수임료도 재판을 이긴 후 성공보수로만 받기로 하는 파격적 조건으로 사건을 수임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방송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방송국 측에서는 우리 돈 3억∼4억 원에 이르는 합의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인 농장주는 확실한 사과를 원했다. 워너브러더스 측은 배상금은 지급하지만 명백한 사과 문구를 제시하지 않았다. 역시 많은 변호사가 돈을 받고 끝내라고 했지만, 김 변호사는 의뢰인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 그는 “한국인은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아임 쏘리(I’m sorry)’라는 문구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결국 워너브러더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방송사 측에서 중간에 ‘한국인들을 화나게 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정도의 문구를 제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분명한 사과 문구를 받아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소송 과정에서 김 변호사는 배 변호사에게 많이 자문했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 변호사는 “당시는 모르니까 용감했지만, ‘내가 하면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최근 김 변호사는 국내 중소기업을 대리해 미국 은행들의 환율 조작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맡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미 불씨가 꺼진 키코(KIKO) 소송을 미국에서 재점화시킨 것이다. 김 변호사는 2013년 국내 중소기업 심텍을 대리해 씨티은행을 상대로 미국에서 소송을 냈다. 뉴욕 맨해튼연방제2순회항소법원 재판부는 지난달 23일 이 소송 항소심에서 ‘관할권이 없다’며 소송을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소송 재개를 명령했다. 1심 판결을 거의 뒤집지 않는 미국 재판의 관행이나 상대가 대표적 글로벌 금융기업이라는 상황을 봤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 변호사는 “씨티은행 측의 자료를 직접 조사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활용해 씨티은행 측의 책임을 입증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김 변호사는 “한국에서 검찰이 압수수색을 해서 박스에 자료를 가득 들고 나오는데 미국에서는 민사 소송에서도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방한에서 키코 소송과 관련한 국내 중소기업들의 상담을 받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심텍의 손해배상 소송 외에 다른 기업들의 소송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없다”면서도 “앞으로 이와 관련한 많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키코 소송의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미국 법원이 결정한 것은 한국 기업이 미국 씨티은행을 상대로 미국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는 취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을 낙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에게서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인식이 묻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관할 인정을 받는 소송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김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재판이 거의 1심에서 끝난다”며 “전체 재판에서 90∼95% 정도는 1심에서 끝나기 때문에 항소를 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2심에서 재판을 뒤집은 것만으로도 미국에서는 큰 이슈가 됐고 미국 외 외신에서도 전화가 많이 왔다”며 “유럽 국가 등의 사례를 봤을 때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의 삶은 ‘도전하는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963년생인 김 변호사는 10세 때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홍콩에서 고교까지 졸업한 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국 대학을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는 “홍콩에서는 대학 가기가 너무 어려워 좋은 대학이 많은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며 “고교 때 친했던 친구 1명이랑 같이 미시간대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둘이서 함께 미국으로 갔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뉴욕주 시러큐스대 로스쿨을 다녔고 1992년에 변호사가 됐다. 회사에 취직해 직장을 다니던 그는 2001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로 마음먹었다.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 개업을 알아보던 김 변호사는 당시 뉴욕주한인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던 배 변호사를 만나 2003년에 결혼해 로펌 ‘김앤배’를 만들었다. 합치기 전 각자 변호사 2∼3명 정도만 고용하는 수준이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변호사 18명을 채용하고 있다. 미국 동부에서 한인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로펌 중에는 가장 큰 규모다. 김 변호사는 “아직은 부끄러운 수준”이라며 “미국 내에서 500위권 이내에 드는 것이 현재의 목표”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방한 기간에 법률시장 개방에 대해 국내 법조계의 적극적인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외국 거대 로펌의 국내 시장 진입이 초읽기에 돌입한 가운데 그는 오히려 국내 로펌의 미국 시장 진출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전 정신으로 무장된 김 변호사다운 ‘역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열변을 토했다.

김 변호사는 “우리나라 로펌이 베트남, 러시아, 중국 등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미국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한국 시장보다 100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법을 가지고 매우 다양하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고, 작은 개인 법률회사들도 사업을 하고 있는데 큰 우리 로펌들이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나타냈다. 김 변호사는 “현대자동차가 베트남에 진출하면 로펌들이 같이 가는데 미국에 진출하면 왜 따라오지 않나”면서 “베트남어, 중국어 잘하는 사람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한국에 더 많을 텐데 미국 시장으로 진출할 생각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로펌의 경쟁력도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김 변호사는 “진출 초기에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5년쯤 지나면 미국 로펌들과 경쟁할 수 있는 실력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개업 도와주다… ‘작업’에 넘어갔죠>

김봉준(53) 변호사의 아내인 배문경(47) 변호사는 가정에서뿐 아니라 사업에서도 김 변호사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다. 2003년 결혼 후 사무실을 합친 두 사람은 이후 회사 규모를 급격히 키워 이제는 미국 동부에서 내로라하는 한인 변호사 로펌이 됐다.

배 변호사는 사실 김 변호사보다 뉴욕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변호사 개업도 먼저 했고 2001년 김 변호사가 사무실을 개업할 당시 배 변호사는 이미 중견 한인 변호사로서 뉴욕한인변호사협회장을 지내고 있었다. 배 변호사는 이후 뉴욕총영사관 자문 변호사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고 있다.

10세 때 홍콩으로 갔던 김 변호사와 달리 배 변호사는 8세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배 변호사가 어렸을 적 살았던 곳은 로스앤젤레스였다. 그는 “어렸을 적 살던 곳에서는 인종 차별 같은 게 많이 없었는데 동부로 대학을 오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인종 차별 같은 걸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뉴욕에 있는 세인트존스대를 졸업하고 1995년부터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처음 개업할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도 한인 변호사를 찾지 않고, 유대인이나 이탈리아 변호사를 찾았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가 사실 뉴욕 지역 한인 변호사 사회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배 변호사는 지난 2014년 맥도날드 직원의 한인 폭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는 등 한인들의 권익 향상 등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배 변호사는 2001년 사무실 개업을 위해 준비하던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배 변호사는 “처음에는 사귀라고 소개를 받은 게 아니었고, 한인변호사회장이니까 좀 도와주라고 해서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업무로 만났지만, 김 변호사가 사적인 이메일을 보내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고 한다. 배 변호사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용에 ‘배가 고프다’는 등 일과 관련 없는 내용이 자꾸 오더라”며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고 웃었다. 한인 농장 개고기 소송을 맡으면서 열정을 보인 김 변호사의 모습에 배 변호사도 많이 끌렸던 것 같았다.

배 변호사는 와인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남달라 지인들과 와인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지인들은 그를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소믈리에’로 부르고 있다.